bgm - 진혼곡 (썸넬 개후지지만 노래만 들어주세요)
일렁이는 파도가 군함에 부딪혀 찬란한 물보라를 자아내는 소리만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모두가 깊게 잠에 빠져든 깊은 새벽. 복도를 울리는 단단한 군화의 소리가 잔잔히 가라앉은 공기를 일깨웠다. 복도는 좁았고, 길게 늘어선 일직선의 통로에는 멀찍한 거리마다 하나씩 알전구가 천장에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주홍빛의 은은한 빛무리가 내려앉은 복도는 어쩐지, 더없이 쓸쓸해 보였다.
오니구모는 한참을 발을 옮기다가, 이윽고 굳게 닫힌 철문의 앞에 멈춰섰다. 그는 이 문 너머에 누가 자리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럴 수 밖에. 그녀를 제 손으로 직접 이 감옥에 처박은 자가, 바로 그 자신이었으니까. 그는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길게 자라난 밀밭에 서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게 웃고있었던 여자, 마르가리타 오딜. 바람에 흩날리던 새하얀 머리칼이 무색하게도 그녀에겐 흰색이 이질적일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그녀는 무엇을 닮았나' 하고 묻는다면 그는 흑조라고 망설임없이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새카만 죄악에 물든, 그러나 티 한점 없이 하얗고 맑은 얼굴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오는 여인. 눈가에 마녀라는 낙인이 찍혀있으면서도, 더없이 고고하고 우아한 여인. 그것이 그가 보는 마르가리타 오딜이었다.
"드디어 와 줬구나."
철문 안쪽에서 야트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말없이 품에서 담배갑을 꺼내고, 한 개피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숨을 빨아들이자, 필터가 빨갛게 타들어갔다. 주홍색 조명 아래 조그맣고 동그란 그 붉은 원만이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폐부를 채우는 담배연기를 내뱉자, 희뿌연 연기가 공중을 부유했다. 연기가 모두 다 흩어져버릴 즈음에 그는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는 어딘지 추궁하는 듯 한 기색을 내비쳤다.
"왜 임펠다운에서 도망쳤나? 얌전히 있었다면 이런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텐데."
"네가 날 보러 와 주지 않았잖아. 임펠다운에 왔으면서."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나는 널 한참 기다렸어.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밀밭에서말이야.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런데도 너는 오지 않더라. 오딜의 목소리는 퍽 쓸쓸하게 들렸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그 말투에 오니구모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아들였을 뿐.
절그럭, 절그럭하면서 쇠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감옥 안에 앉아있던 오딜이 서서히 발을 옮겨 자리를 옮기는 듯 했다. 그 소리는 점점 문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오니구모의 눈가가 살짝 좁혀들어갔다. 한참 말이 없던 그녀에게 이번엔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이제 어쩔 셈이지?"
오딜은 이번에도 답이 없었다. 철문에 사슬이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를 다시한 번 일깨웠다. 육중한 문에 그녀가 기대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미세한 소리로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잔잔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담배 필터가 타들어가면서 회색 잿가루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매캐한 담배냄새가 복도를 스물스물 채워가고 있었다.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절박하게 들렸다.
"난 이제 그만 죽으려고 해."
"…왜지?"
"오니구모. 정말 몰라서 묻는거야?"
오딜은 그의 물음에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와 그녀의 사이에는 두꺼운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서로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어쩐지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의 눈동자엔 체념이 물들고 서운함이 가득한 낯빛으로 바닥을 내려다 보는 채, 어깨를 들썩이면서 헛웃음을 짓고 있겠지.
그는 그녀가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응당 그래야만 했다. 그녀는 죄를 저지른 자였고, 자신은 그런 그녀를 정의로써 단죄한 자였으므로.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딜은 언제나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결같이 그에게 사랑을 속삭여왔다. 그가 그녀에게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버린 그 날부터, 하염없이. 늘 그렇게.
"나는 아마,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천룡인들에게 노예처럼 부려지게 될 거야. 내 능력이라면 그들의 병을 낫게 하고, 무병장수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으니까. 학대당하고, 멸시받으면서 살게 되겠지. 너를 만나기 전 처럼."
"……."
"너는 몰라. 내가 얼마나 참담한 심정으로 그 나날들을 견뎌왔는지. 죽지 못해 살아왔는지. 그러니까 날 보고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살인자라고 하는 거겠지."
그의 손 끝에 머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그는 마지막 숨을 내뱉고 군화로 담배꽁초를 밟아 가볍게 짓이겼다. 타들어가던 필터에서 불이 꺼지고, 남은 건 허망한 잿가루와 짓밟힌 한 개피의 담배뿐이었다. 왜일까. 그는 목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면서. 자유롭게…. 그렇게 살기 위해선 나를 지켜줄 보호막이 필요했어. 그래서 도플라밍고의 수하로 들어간 거야. 그의 수하가 되면 모든 죄를 면책받으니까."
"그래서?"
"그런데…, 더 이상 날 지켜줄 존재는 세상에 없네. 아무도 없어. 아무도…."
"……."
"그래서 죽으려고 하는거야. 사실 죽고싶지는 않아, 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죽는 것 보다 비참한 삶은 이미 겪어봤어. 또 다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
"그리고, 바라는 걸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는 삶은 비참하잖아. 내가 가장 바랐던 것 한 가지 조차도 이루지 못했는걸."
오딜의 낮은 웃음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조금 거센 파도가 일었는지, 선체가 살짝 움직이면서 천장에 매달려있던 알전구가 좌우로 가볍게 흔들렸다. 철문과 복도를 비추던 불빛이 일렁거리고, 불완전한 감정이 그의 발밑에서 스물스물 기어올라왔다.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권총이 수납되어있는 총집을 만지작거렸다. 만약을 위해 언제나 한 발을 장전해두고 다니는 작은 리볼버였다.
"가장 원했던 게 뭐지?"
절그럭.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쇠사슬이 또 다시 철문에 부딪혀왔다. 마치 '너는 왜 그걸 몰라' 하면서 그를 질책해오는 것만 같았다. 순간 그는 그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그녀가 무어라 대답할지 알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대답이, 그를 옭아매고 조여올 것 같아서.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나는 네가 내 사랑을 받아주길 바랬어."
"…그건 사랑이 아니다."
"하다못해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이라도 해주길 바랬어. 그게 단 한가지, 내가 가장 원했던 거야."
오니구모는 담배 한개피를 더 꺼내들었다. 불을 붙이고, 숨을 빨아들이는 몸짓이 이전보다 조금 더 느릿해 보였다. 흔들리는 불빛, 흔들리는 연기, 흔들리는 마음…. 저 여자는 마을 주민을 모두 몰살한 잔인한 범죄자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 처럼 연기를 하면서, 여기서 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 그게 분명한데. 그런 그녀에게 정을 주어선 안 되는데. 그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에게 연민이 느껴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발바닥을 타고 스물스물 기어올라온 알 수 없는 감정은 어쩌면 죄책감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마음을 여지껏 외면하고, 그녀의 아픈 기억을 서류상의 기록으로만 치부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 혹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녀의 감정이 진실로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실날같은 믿음. 엉켜진 감정을 욱여넣고, 내리누르면서, 그는 탄식처럼 숨을 내뱉었다. 또 한 번,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그는 총집을 열어, 고이 넣어져있던 리볼버를 꺼냈다. 한 발. 단 한 발로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그가 가진 몸뚱이는 그렇게 유약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 만약 그녀가 그를 속이고, 그를 향해 총을 쏜다고 해도 그는 죽지 않을 터였다. 연이어 흘러들어온 니코틴이 뇌를 일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미약한 두통을 느끼면서 그는 주머니에 쑤셔박았던 열쇠를 잡아들었다. 열쇠구멍에 절그럭거리는 키를 넣고 돌리자, 철컥. 하며 걸쇠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육중한 철문을 당기자 끼이익, 하면서 듣기싫은 경첩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천천히 문을 열자, 그 앞에 서있던 오딜의 모습이 드러났다. 안그래도 하얗던 얼굴은 더 희게 질렸고, 몸뚱이는 더없이 수척해보였다. 따듯한 색의 주홍빛이 피부에 스며드는데도 그 창백한 낯빛을 가릴수는 없었다. 그녀는 녹색의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오니구모는 한 발자국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녀의 손목을 옭아매고 있는 수갑을 풀어주었다. 쇠사슬과 수갑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마찰음을 자아냈다. 그 이후로는 정적이 맴돌았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한 번, 선체가 흔들렸다. 일렁이는 주황색 빛무리가 그녀의 눈동자에 번져나갔다. 그 모습에 그는 다시금 갈증이 이는 걸 느꼈다.
그가 손을 들어 총구를 그녀의 이마에 들이대자, 오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일말의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그녀의 야윈 얼굴을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쏴, 그녀가 재촉했지만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저, 한참동안 그녀의 모습을 눈에 새겨넣을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총을 내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들었다. 녹색 눈이 다시 뜨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총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오니구모는 그녀에게 총을 쥐어주고 그대로 등을 돌려 발을 옮겼다. 일직선의 복도, 흔들리는 전구, 매운 담배 연기.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눈 안에 제가 사랑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담았다. 총구가 그녀의 관자놀이에 가 닿았다. 탄창이 돌아가는 소리와 차가운 금속의 촉감에 그녀는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사랑해."
닿지 않을 고백이라 해도, 그녀는 이 말을 전해야만 했다. 마지막까지 그녀가 가장 원하는 바람이었으니까. 오니구모. 난 그곳에 있을거야. 그곳으로 와, 밀밭으로. 우리가 만났던 밀밭으로…. 그 애절한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총알이 이미 그녀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으므로.
그의 등 뒤로 단말마같은 총소리와, 사람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해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진득한 피냄새가 복도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녀는 총으로 그를 겨누지 않았다. 그는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고 마지막 연기를 뱉어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인정해야 했다. 인정할 수 밖에. 그래, 너는 나를 사랑했구나. 마르가리타 오딜. 네가 내게 품은 감정은 정녕 사랑이었구나. 그런 너의 진실된 고백을 나는…. 죄책감이 온 몸을 짓누르는 감각을 느끼면서 오니구모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죄 진 자가 잰 걸음으로 죄악으로부터 도망치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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